한줄소개
울산 동해안에 위치하는 조선시대 연변봉수
내용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 밤에는 횃불과 낮에는 연기로 적의 동태나 민정 상황 등을 알렸던 통신제도이다. 군사적인 목적으로 봉수가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로 추정되며, 1149년(의종 3)에는 봉수의 거화수(炬火數)를 규정하고, 봉수군에게 생활의 대책을 마련해주었다.
고려 말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봉수제가 강화하였으며, 조선 세종대에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거화거수(擧火炬數) 등 관계 규식을 새로 정하며 각 도 연변의 연대(烟臺)를 새로이 축조하고 나아가 봉수선로(烽燧線路)를 일제히 획정하는 등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오장(伍長)과 봉군이 배치되어 근무하면서, 평상시에는 한 홰[烽], 적이 나타나면 두 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홰,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네 홰, 적과 접전하면 다섯 홰의 봉수를 올렸다고 한다. 1894년(고종 31년)에 전보통신이 보급되면서 폐지되었다.
연대의 설치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로 구분된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 목멱산(木覓山)에 위치하여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 불렀다. 연변봉수는 해륙 변경(海陸邊境)의 제1선에 설치하여 연대라 호칭한 것이다.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 수적으로 대다수였다.
우가산 유포 봉수대는 우가산 정상에 위치한 연변봉수의 하나로, 남목천(현재의 주전)에서 봉수를 받아 경주 하서지로 전하였다. 각 봉수와의 거리는 남쪽 남목봉수(주전봉수)와는 5.75㎞, 북쪽 하서지봉수와는 10㎞이다.
유포봉수는 조선저기에 유등포 봉화로 불리기도 하였다. 연대로 둘러싸고 있는 방호벽은 석축으로 방형에 가까우며, 석축의 높이는 1m~2m 가량 남아있다. 2003년 실시한 지표조사에 의하면 유포봉수대는 방호벽으로 조성된 공간의 동쪽으로 치우쳐서 서쪽과 남쪽으로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이곳에서 많은 양의 기와편과 약간의 자기편이 수습되었는데, 봉수대를 운영하기 위한 물품보관 창고가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석으로 쌓은 둥근 모양의 아궁이와 주위의 방호벽, 봉수군 막사터가 잘 남아 있어서 우리나라 연변 봉수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부가정보
울산광역시 기념물